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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일반경제

제1화 [뚱스사이언스카페] 씨앗 보관하는 종자은행, 전쟁 때도 지켜야할 인류의 미래

by by 서울뚱스 2024.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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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4일 우크라이나 국립식물유전자원센터의 세르게이 아브라멘코 연구원이 러시아군의 포격에 불타버린 씨앗과 연구시설을 찍은 영상을 인터넷에 공개했다. 이곳은 세계 열째 규모의 종자은행으로, 식물 1802종의 종자 자원 15만여 점을 보관하고 있었다.

각국은 인구 증가와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농작물은 물론, 야생식물의 종자까지 한데 모아 보관하고 있다. 농업이 절멸되는 위기에 대비하고 신품종을 만들 유전자원을 찾기 위해서다. 인류의 미래가 달린 이 씨앗들이 우크라이나를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으로 잿더미가 될 위기에 처했다. 전쟁이 인류의 미래를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종자은행 파괴 잇따라

우크라이나는 ‘유럽의 빵바구니’로 불릴 정도로 농업이 발전한 국가이다. 농산물 수출 품목 중 해바라기유는 세계 1위, 보리와 옥수수는 세계 4위, 밀은 세계 6 위를 차지한다. 우크라이나는 농업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북동부 도시 하르키우에 종자은행을 운영하고 있다.

다행히 우크라이나 종자은행의 피해는 일부에 그친 것으로 밝혀졌다. 종자은행 연구원들은 정기적으로 기존 종자를 파종하고 여기서 다시 종자를 얻어 새로 보관한다. 국제기구들에 따르면 이번에 러시아군의 포격으로 불타버린 것은 봄에 파종하려고 준비하던 씨앗들이고, 핵심 자원은 여전히 지하에 안전하게 보관 중이다.

그렇다고 안심하기엔 이른 상황이다. 러시아군이 하르키우에서 물러났다고 해도 전쟁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특히 포도나 딸기는 줄기를 잘라 번식하기 때문에 야외 재배지에서 고스란히 위험에 노출된 상태다. 연구원들도 상당수 군대에 들어가 종자를 관리할 인력도 부족한 형편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주희 국립농업과학원 농업유전자원센터장은 “2차 대전 중 러시아 바빌로프 종자은행의 과학자들은 나치의 공격에서 볍씨를 지키느라 굶어 죽는 쪽을 택했다”며 “그랬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종자은행을 공격하다니 통탄할 일”이라고 말했다.

앞서 다른 나라에서도 우크라이나 종자은행과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2002년 아프가니스탄 카불의 종자은행이 탈레반과의 전쟁 도중 파괴되고 약탈당했다. 1년 후 이라크의 종자은행도 같은 일을 당했다. 시리아 알레포에 있던 국제 건조기후지역 종자은행은 내전이 발발하면서 2012년 문을 닫았다. 국제건조지역농업연구센터는 이 시설을 레바논과 모로코에 분산 이전했다.

◇미래 위한 살아있는 유산이자 생명보험

전쟁이 하르키우의 종자은행을 파괴하면 우크라이나의 농업은 물론 인류의 미래도 사라진다. 유엔 식량기구에 따르면 20세기 이후 각국이 농업생산량을 높이려고 몇몇 품종만 재배하면서 농작물 다양성이 75%나 감소했다. 만약 현재 재배 중인 작물들이 새로운 전염병이나 기상이변을 이겨내지 못하면 인류가 당장 굶어 죽을 수도 있다.

실제로 19세기 중반 아일랜드는 주식이던 감자 농사를 망치면서 인구 800만 명 중 100만 명이 죽고 200만 명이 이민을 갔다. 밀집 재배하던 감자 품종이 곰팡이병에 일시에 절멸한 것이다. 과학자들은 감자처럼 한 품종만 재배하는 커피와 바나나도 기후변화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고 경고한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무시되던 재래종이나 야생종이 다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최근 발전한 생명공학 기술로 재래종, 야생종에서 유용한 유전자원을 뽑아내 기후변화와 인구 증가를 감당할 신품종을 개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르웨이 유전자원센터장인 라이스 리케 스테픈슨은 영국 경제지 이코노미스트에 “종자은행은 미래를 위한 생명보험과 같다”라고 설명했다. 이주희 농업유전자원센터장은 “후손에게 물려주는 살아있는 유산”이라고 했다.

전 세계에는 1700여 종자은행이 있다. 각국은 전쟁이나 자연재해로 자국 종자은행이 파괴되는 일에 대비해 종자를 여러 곳에 중복 보관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작물 종자 자원 27만 2000여 점을 모아 수원과 전주에 중복 보관하고 있다.

◇종자은행 보호할 국제협약 만들어야

최근에는 전 세계 종자 자원을 모아 영구 보관하는 시설도 등장했다. 대표적인 곳이 지난 2008년 문을 연 노르웨이 스발바르 글로벌 시드볼트(seed vault·종자 금고)이다. 영구동토층 75m 지하에 설치해 별도 냉방장치 없이도 연중 영하 18도를 유지할 수 있다.

스발바르는 한 번 씨앗이 들어오면 다시 내보내지 않는다. 정철호 산림청 대변인은 “일반 종자은행은 입출금이 자유로운 은행처럼 언제든 씨앗을 꺼내 연구를 할 수 있지만 시드볼트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영구 보관하는 금고”라고 말했다. 스발바르 시드볼트는 2015년 딱 한 번 내전으로 종자은행이 파괴된 시리아를 위해 종자를 꺼내 준 적이 있다.

우리나라 산림청도 경북 봉화군의 지하 46m에 백두대간 글로벌 시드볼트를 만들었다. 스발바르와 함께 세계에 단 두 개만 있는 시드볼트이다.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시드볼트 운영센터는 “스발바르는 주로 작물 종자를 보관하지만 백두대간 시드볼트는 야생식물 종자 중심”이라며 “현재 13만 8103점의 종자 자원을 보관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농업유전자원센터의 작물 종자도 일부 스발바르와 백두대간 시드볼트에 중복 보관 중이다.

하지만 시드볼트도 영원한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 스발바르 시드볼트는 최근 온난화로 동토층이 녹는 바람에 물이 새는 사고가 발생했다. 전쟁 중에 누군가 작정하고 덤비면 아무리 단단한 지하 시드볼트라도 견디기 어렵다.

과학계에서는 전쟁 중에 적십자 표시가 있는 병원은 적군이라도 공격하지 않듯 종자은행은 누구나 보호하는 국제협약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인류의 미래가 담긴 씨앗을 지키기 위해 국제적 연대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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